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 서예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글로벌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전통 예술 형식으로 여겨졌던 서예가 현대적 변용을 통해 국제 예술 무대로 진출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서예는 단순한 필기 기술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발전해왔다. 중국에서 시작된 서예는 갑골문자부터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에 이르는 다양한 서체를 발전시켰다.
국립중앙박물관 동양서예연구소 김민수 연구원은 "한국 서예는 삼국시대부터 고유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와 같은 대가들을 통해 한국만의 미학을 확립했다"고 설명했다.
전통사회에서 서예는 문인들의 필수 교양이자 인격 수양의 방법이었다. "글씨는 곧 사람(書如其人)"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서예는 작가의 인품과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서울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준영 교수는 "서예는 종교적, 철학적 가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며 "불교 경전 필사는 종교적 수행의 일환이었고, 유교 경전을 쓰는 행위는 학문적 탐구와 도덕적 완성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분석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서구 문화의 유입과 근대화 과정에서 서예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한자 사용 감소와 필기도구의 변화로 서예의 일상적 실용성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예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나는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정통파 서예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 감각과 실험을 통해 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현대서예다.
현대서예는 전통적 기법과 정신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의 요소를 접목한 실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의 '문자추상', 일본의 '젠(禪) 서예', 중국의 '실험수묵'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제갤러리 큐레이터 제임스 리는 "최근 5년간 주요 국제 아트페어에서 동양 서예 작품의 거래량이 30% 증가했다"며 "특히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혁신적 작품들이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서예의 아날로그적 가치는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한국서예학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예를 배우는 20-30대 젊은층이 2020년 대비 1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서예 플랫폼 '붓펜'을 운영하는 이지현 대표는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이 주요 필기 도구가 된 시대에, 서예는 손으로 직접 경험하는 감각적, 신체적 활동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서예는 현대 글로벌 사회에서 문화 간 소통의 도구로도 기능하고 있다. 지난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서예: 전통과 혁신' 전시는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으며 서구 관객들에게 동양 철학과 미학을 소개하는 기회가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서예는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문화자산"이라며 "2025년부터 '글로벌 한국 서예 프로젝트'를 통해 국제 교류와 현대적 서예의 발전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AI 기술과 서예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실험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서울대학교 융합기술연구소는 지난달 AI와 협업한 서예 프로젝트 '디지털 붓의 흔적'을 발표했다.
연구를 주도한 정성호 교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서예의 표현 방식은 변화하지만, 필자의 정신과 감정이 표현되는 인간적 예술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을 간직한 서예는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화하는 서예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