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사라는 거대한 담론의 장에서 천경자(千鏡子, 1924~2015)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장르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신화적 텍스트로 존재한다. 20세기 한국 화단이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채색화(彩色畵)를 배격하고 수묵화(水墨畵)와 추상미술로 급격히 경도되던 시기, 천경자는 오롯이 자신만의 색채와 형상을 고집하며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그녀의 예술은 흔히 '한(恨)'과 '환상(Fantasy)'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되지만, 이러한 단편적인 수사만으로는 그녀가 이룩한 방대한 예술적 성취와 그 이면에 깔린 실존적 투쟁의 깊이를 온전히 포착하기 어렵다.
천경자는 단순한 화가를 넘어, 자신의 삶을 문학적 텍스트와 회화적 이미지로 동시에 기록해 나간 '기록자'이자, 가부장적 질서와 예술 제도의 억압 속에서도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저항자'였다. 그녀의 캔버스는 현실의 비극을 색채의 환각으로 치환하는 연금술의 실험대였으며, 그 위에서 뱀과 꽃, 그리고 여인은 작가의 분신으로서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본 연구 보고서는 천경자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녀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통시적이고 미시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 연구들이 간과했던 초기 일본 유학 시절의 화풍 형성 과정부터, '미인도' 위작 논란이 남긴 미술사적, 법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다룬다. 또한, 그녀가 구사한 독특한 재료 기법인 석채(石彩)와 분채(粉彩)의 물성(Materiality)을 분석하고, 문학과 회화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규명함으로써 천경자 예술의 심연을 탐구한다. 이는 단순히 한 예술가에 대한 회고를 넘어, 한국 근현대 미술사가 안고 있는 채색화의 위상, 여성 작가의 위치, 그리고 예술품 감정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천경자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유년 시절과 초기 성장 배경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녀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나르시시즘과 비극적 정서는 고흥에서의 유년기와 일본 유학 시절, 그리고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천경자는 1924년 11월 11일(실제 생일은 1923년 10월 5일로 알려짐), 전라남도 고흥군 서정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녀의 본명은 '옥자(玉子)'였으나, 훗날 스스로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는데, 조부는 그녀를 "짜야"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무릎에 앉혀 키웠다. 이러한 조부의 절대적인 사랑은 천경자 내면에 강한 자존감과 나르시시즘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
고흥이라는 향토적 배경 또한 그녀의 감수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남도의 따뜻한 햇살과 원색적인 자연 풍광은 훗날 그녀가 구사하는 화려한 색채 감각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그녀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고향의 인물들은 훗날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길례 언니'이다. 보통학교 선배이자 소록도 간호사였던 길례 언니는 어린 천경자에게 '순수', '동경', '아름다움', 그리고 '구원'의 상징적 존재로 이상화되었다.3 노란 원피스에 하얀 모자를 쓴 길례 언니의 이미지는 천경자의 초기작부터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변주되어 나타나며,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몽환적 여인상의 원형(Archetype)을 이룬다.3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한 천경자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1년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조시비예술대학) 일본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는 나혜석, 이현옥, 박래현 등 한국 근대 여성 화가들의 산실이었다.1
유학 시절 천경자는 일본 화단 특유의 섬세하고 장식적인 채색화 기법, 즉 '니혼가(日本画)'의 기초를 철저히 습득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사생하는 엄격한 훈련은 그녀의 탄탄한 뎃생력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성과는 곧바로 가시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한 <조부상(祖父像)>이 입선하고, 이듬해인 1944년 제23회 선전에서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그녀는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4
[표 1] 천경자의 초기 수상 및 활동 내역 (1940년대)
연도
행사/전시명
수상/출품작
비고
1941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
일본화 전공
1943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조부상(祖父像)>
입선, 조부를 모델로 한 사실적 인물화
1944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노부(老婦)>
입선, 귀국 후 제작
1945
-
-
전남여고 교사 부임
이 시기 작품들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아카데미즘 화풍에 충실했으나, 인물의 표정에서 읽히는 미묘한 우수와 내면의 깊이는 이미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고 있었다. 특히 <조부상>에서 보이는 세밀한 필치와 은은한 색채 운용은 그녀가 이미 학생 시절부터 재료를 다루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자 귀국한 천경자는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던 것은 개인사적 비극이었다. 전남여고 강당에서 올린 첫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고, 남편 이형식은 가정 경제를 돌보지 않아 천경자는 교사 생활과 그림 판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4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 중 남편은 행방불명되었고,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혈육인 여동생 '옥희'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겹쳤다.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봐야 했던 무력감, 가장으로서의 중압감, 그리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천경자는 깊은 절망과 허무에 빠졌다. 그러나 이 극한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그리고 미치지 않기 위해 붓을 잡았고, 자신의 내면에 똬리를 튼 고통을 화폭에 토해내기 시작했다.5
1950년대 초반, 천경자는 한국 화단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시기 그녀의 작품은 개인적 비극을 보편적인 예술적 상징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며, 특히 '뱀'이라는 파격적인 소재의 등장은 한국 미술사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51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제작된 <생태(生態)>는 천경자 초기 화풍의 정점이자 그녀를 '천재 여류 화가'로 각인시킨 문제작이다. 가로 87cm, 세로 51.5cm의 화면에 35마리의 독사가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 그 자체였다.7
천경자는 자서전에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회고했다. "징그러워 몸서리쳐지는 뱀을 그리면서, 이 지독한 가난과 슬픔, 고독을 이겨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 28세였지만, 뱀을 35마리나 그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당시 그녀가 겪었던 인생의 무게와 고통의 크기를 상징한다고 보기도 하고, 35세까지라도 살고 싶다는 생존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5 그녀는 뱀집을 찾아가 유리창 너머로 뱀을 관찰하며 스케치했고, 그 과정에서 뱀의 비늘 하나하나가 발산하는 독기와 생명력을 화폭에 옮겨 담았다.
천경자의 작품이 지닌 독보적인 아우라는 그녀가 구사한 독특한 재료와 기법에서 기인한다. 해방 후 한국 화단이 왜색 시비를 피하기 위해 수묵과 담채 위주로 흘러갈 때, 그녀는 꿋꿋하게 진채(眞彩)를 고수했다.
[표 2] 천경자 채색화 기법과 일반적인 한국화/서양화 기법 비교
구분
천경자 채색화 (석채/분채)
전통 수묵화 (한국화)
서양화 (유화/아크릴)
주재료
석채(광물성), 분채, 아교
먹, 물, 화선지
오일, 캔버스, 합성수지
발색 원리
입자의 난반사, 안료의 침투
먹의 농담(명도), 번짐
안료의 층위, 불투명 덮기
채색 방식
수십 회의 덧칠과 씻어내기 (적층)
일필휘지, 단발성 붓질
임파스토, 글레이징
질감 표현
건조하고 거친 입자감 (부석거림)
평면적, 종이의 질감 유지
매끄럽거나 두터운 유분감
수정 가능성
물로 씻어내며 수정 가능 (흔적 남음)
수정 불가능 (일회성)
덧칠하여 완전 수정 가능
1960년대 중반 이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안정을 찾은 천경자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여인상'을 확립해 나간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현실의 고통을 환상적인 색채와 이국적인 풍물로 감싸 안으며, 작가의 자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투영한다.
천경자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델이 누구이든 간에 결국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이다. 그녀는 "내 그림 속의 여자는 모두 나"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다.
1977년 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천경자 인물화의 백미로 꼽힌다. 가로 36cm, 세로 43.5cm의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서사가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난 명작이다.7
앞서 언급한 '길례 언니'는 1970년대 이후 천경자 작품의 중요한 테마로 자리 잡는다. <길례 언니>(1973)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그녀는 항상 노란색 계통의 옷을 입고 이국적인 배경 속에 서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길례 언니는 천경자의 기억 속에서 '영원한 처녀성'과 '고향의 따뜻함'을 간직한 이상적인 여인으로 재창조되었다. 현실의 삶이 고달플수록 천경자는 캔버스 속에서 길례 언니를 소환하여 위안을 얻었다.3
1969년 남태평양 여행을 시작으로 천경자는 붓 하나를 들고 전 세계를 유랑했다. 그녀의 스케치 기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새로운 영감을 찾아 떠나는 예술적 순례였다. 이 경험은 그녀의 팔레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초기 천경자의 색채가 한국적 정서에 기반한 다소 가라앉은 중간색 위주였다면, 남태평양, 아프리카, 중남미, 인도 등을 여행한 후 그녀의 색채는 폭발적으로 화려해졌다.
천경자는 그림만큼이나 글솜씨도 뛰어났다. 그녀는 18권에 달하는 수필집을 출간했는데, 이는 당대 베스트셀러가 되며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위작 시비는 천경자의 예술 인생 후반부를 송두리째 뒤흔든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그림의 진위 문제를 넘어, 국가 권력과 예술가의 개인적 권리가 충돌했을 때 드러나는 한국 미술계의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1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위해 소장품인 <미인도>를 아트 포스터로 제작해 배포했다. 우연히 이를 본 천경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것은 내 그림이 아니다"라고 천명했다. 그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식을 못 알아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15
이 작품은 원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소장했던 것으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재산이 압류되면서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로 이관된 것이었다.
천경자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감정을 통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작가의 주장을 '오랜 세월에 의한 기억 착오'나 '작품 수준이 떨어져 스스로 부인하는 것(자기부정)'으로 몰아갔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천경자는 "붓을 꺾겠다"며 절필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직을 반납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이는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 타의에 의해 화단에서 추방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15
2015년 천경자 화백이 타계한 후, 유족들은 다시 한번 <미인도>의 위작 의혹을 제기하며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들을 고소했다. 이에 검찰은 대대적인 재수사에 착수했다.
[표 3] '미인도' 위작 논란 타임라인 및 주요 쟁점
시기
주요 사건
내용
비고
1977
작품 제작 추정
<미인도> 제작 연도로 추정 (국립현대미술관 주장)
1980
소장 경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재산 압류로 국립현대미술관 이관
1991
1차 논란
국립현대미술관 포스터 배포 -> 천경자 "위작" 선언
작가 절필 및 도미
1999
위조범 자백
위조범 권춘식, 자신이 그렸다고 자백했으나 번복
신빙성 논란
2015
작가 타계
천경자 화백 별세, 유족이 재수사 의뢰
2016
2차 논란
佛 뤼미에르 팀 "위작" vs 韓 검찰 "진품" 발표
상반된 결과
2023
대법원 판결
유족의 국가배상 청구 소송 기각 (심리불속행)
법적 분쟁 종결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1·2심에 이어 2023년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법원은 "검찰 수사에 위법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뿐, <미인도>의 진위 자체를 법적으로 확정 지은 것은 아니다.15 이 사건은 '창작자의 저작인격권'이 국가 기관의 권위와 과학이라는 이름의 감정 기술 앞에서 어떻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윤범모 등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한국 미술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며, 감정 시스템의 후진성과 불투명성을 강하게 비판했다.17
미인도 사건으로 조국에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경자는 자신의 작품이 흩어지지 않고 국민들에게 영원히 사랑받기를 원했다.
1998년, 천경자는 자신이 평생 아껴온 주요 작품 93점과 화구, 소장품 전량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여기에는 <생태>(1951),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그라나다의 두 자매>(1993) 등 각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기증의 변으로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고 밝혔다.7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소문 본관 2층에 '천경자 컬렉션 전시실'을 마련하여 상설 전시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미술관 역사상 보기 드문 작가 전용 공간이다.
2024년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은 대규모 기념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천경자를 단독으로 조명하는 것을 넘어, 박래현, 이현옥 등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3인의 작품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천경자를 한국 여성 미술사의 거시적 맥락 속에 위치시켰다. 전시는 그녀가 단순히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전쟁, 가부장제라는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주체적인 여성이었음을 강조했다.4
천경자의 예술 세계를 연구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고통과 욕망의 지층을 탐사하는 과정이다. 그녀는 한국 화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던 채색화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 독보적인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석채와 분채를 겹겹이 쌓아 올린 그녀의 화면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녀가 흘린 눈물과 한숨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영혼의 지질도와 같다.
천경자 예술의 핵심은 '자기 고백'과 '자기 치유'에 있다. <생태>의 뱀들이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면, <길례 언니>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의 여인들은 상처 입은 자아를 위로하는 환상의 대리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예술의 재료로 삼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그 솔직함과 대담함은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그녀의 이름 뒤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논란은 천경자라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기준과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그녀는 자신의 혼이 담기지 않은 그림을 결코 자신의 것이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탄생 100주년을 지나, 우리는 '괴짜 여류 화가' 혹은 '비운의 화가'라는 자극적인 수사를 거두고 천경자를 온전한 예술가로서 재평가해야 한다. 그녀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줄타기하며 한국적 채색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남겨진 93점의 작품들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강렬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라고. 그녀의 예술은 그 깊은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가장 화려한 꽃으로 한국 미술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연도
주요 내용
비고
1924
11월 11일 전남 고흥 출생
실제 생일은 1923년 10월 5일로 알려짐 2
1941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일본화과, 사실적 묘사 수업
1943
제22회 선전 <조부상(祖父像)> 입선
외조부를 모델로 함 4
1944
제23회 선전 <노부(老婦)> 입선, 귀국
1951
<생태(生態)> 제작, 부산 개인전
뱀 35마리 묘사, 화단에 충격 20
1954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 부임
(~1974년까지 재직)
1955
제7회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수상
작품 <정(靜)>
1969
첫 해외 스케치 여행 (남태평양 등)
색채의 화려한 변화 시작 9
1972
베트남 종군화가단 참여
유일한 여성 작가로 파견 21
1974
홍익대학교 교수직 사임
전업 작가의 길 선언
1977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제작
대표적인 자전적 인물화 12
1978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선임
1991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논란
절필 선언 및 미국 이주 17
1995
호암갤러리 대규모 회고전 개최
10만 명 이상 관람객 동원
1998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 기증
한국화, 드로잉 등 전량 기증 7
2003
뇌출혈로 병상 생활 시작
2015
8월 6일 미국 뉴욕에서 타계
향년 91세
2016
검찰, <미인도> '진품' 결론 발표
유족 측 강력 반발 15
2024
탄생 100주년 기념전 (서울시립미술관)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4
작품명
제작연도
재료
특징 및 해설
생태 (Ecstasy)
1951
종이에 채색
천경자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35마리의 뱀이 엉켜 있는 구도로 생존에 대한 오기와 저항 정신을 표현함. 7
초원 II
1978
종이에 채색
아프리카 케냐 여행의 인상을 담음. 코끼리와 얼룩말, 그리고 고독한 여인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풍경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22세의 자신 혹은 요절한 동생을 추모하며 그린 자화상적 인물화. 뱀을 머리에 두른 여인의 모습. 12
그라나다의 도서관장
1993
종이에 채색
스페인 그라나다 여행 중 만난 여성을 모델로 함.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인 배경이 돋보이는 후기 수작. 4
알라만다의 그늘
1980년대
종이에 채색
남태평양의 꽃 알라만다를 배경으로 한 여인상. 노란색의 주조색이 강렬함.
길례언니
1973
종이에 채색
유년 시절의 이상적 여인상을 형상화. 하얀 모자와 노란 옷이 특징적임. 3
참고 문헌 및 출처: 본 보고서는 사용자 쿼리에 따른 연구 자료 Snippets 20 ~ 3 및 4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각 사실 관계와 주장에 대한 근거는 본문 내에 대괄호 표기 ``를 통해 명시하였습니다.